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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박병석 국회의장, '회상사 둘째아들' '합리적 의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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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훈
기사입력 2020-06-05

▲ 박병석 국회의장     © 인터넷언론인연대

 

합리적 의회주의자, 인쇄소집 둘째 아들

 

박병석 국회의장은 합리적 의회주의자다. 21대 국회 최다선인 그의 정치색이다. 그래서 간혹 그는 계파색이 옅은 정치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원칙에 충실하자는 그의 신념이 올곧은 정치역정을 이끌어 왔다.
박 의장은 대화와 협의를 중시한다. 차분하고 논리적인 화법으로 타협의 정치를 펼쳐왔다. 식물국회, 동물국회의 오명으로 얼룩진 헌정사에서 21대 국회가 새로운 기대감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박 의장은 스스로를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원칙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를 덕목으로 갖추고 있다.

 

정치하는 이유


박 의장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는 소회를 밝힌바 있다.


 “제가 국회의원으로 하는 모든 일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역사의 진전에 부합하게 해주십시오. 열심히만 하면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는 세상, 인생에 한 번 실패해도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세상, 어느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꿈의 크기가 달라지지 않는 세상, 남북이 화해와 평화의 강을 함께 노 젓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게 해주십시오.”


그의 신념이자, 그가 정치를 하는 이유다.

 

하심(下心), 몸에 배다


박 의장은 부지런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초선 때는 국회와 지역구를 오가며 4년 간 기차를 700번 이상 탔다고 한다. 그의 발로 뛰는 정치는 6선이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역구민의 의견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경청했다. 국회가 열리지 않는 시간이나 주말에는 어김없이 지역구를 찾아 민심을 들었다. 하심(下心)이 몸에 밴 정치인이다. 그래서 지역구민이 지어준 그의 별명이 ‘한결같은 사람’이다.

 

부도 경험 서민을 읽다


박 의장의 성품은 부친인 故 박홍구 선생에게서 기인한다. 부친은 성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족보전문출판사 ‘회상사’를 창업하고 운영했다.


박 의장이 대학 재수생 시절 회상사가 부도를 맞았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부도난 인쇄소집 둘째 아들, 서민과 약자를 위한 그의 열정의 배경이다.


그는 지금도 부친이 남긴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고 산다.


“창과 방패는 무기의 일종이기에 무기 장사는 하지 마라. 그러나 창은 사람을 해치는 것이나, 방패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니 부득이 무기 장사를 하더라도 방패 장사를 하라.”


남에게 모질게 대하지 않고 많이 베푼 부친의 심성 탓에 박 의장 집안은 대전에서 자못 이름을 알렸다.

박 의장이 민주당의 불모지였던 대전에서 16대 총선에 나서며 썼던 슬로건이 ‘회상사집 둘째 아들’이다.

 

일생일업(一生一嶪)


박 의장은 1975년 만 23살의 나이로 중앙일보 기자가 된다. 기자를 ‘일생일업’으로 삼고자 했던 그다.


면접시험을 주관하던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당시에 수교국이 아니었던 중공 베이징특파원으로 가고 싶다고 답했다.


기자가 된 그는 홍콩특파원으로 재직하던 1989년 천안문 사태를 특종 보도해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반정부 시위가 한창이던 베이징에서 대부분의 특파원들이 철수했지만, 돌아오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회사 측의 만류에도 생명을 걸고 자리를 지켜 <중국 조자양 총리 체포 구금> 기사로 세계적인 특종을 할 수 있었다. 박 의장의 열정과 뚝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1996년에는 <재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는 기사로 다시 한 번 한국기자상을 수상하는 등 기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1996년 경제2부장, 97년 부국장 겸 경제부장을 지냈다.

 

역사를 바꾸고 싶다


박 의장의 일생일업(一生一嶪) 기자생활은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변화한다.
‘역사의 기록자’란 운명 같던 천직이 외부적 요인으로 흔들릴 수 있다는 현실에 적잖이 낙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의 기록자로 남기보다 역사를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1997년 중앙일보를 퇴사하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박 기자에서 박 의장으로의 진화는 어쩌면 순리를 따른 자연선택이었다. 우리 정치가 21대 국회 이전과 이후로 구별되기를 기대하는 데는 그의 의지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한 몫 한다.

 

세 잎 클로버의 행복


박 의장은 행운의 추억보다는 일상 속의 소박한 행복을 소중히 여긴다.


어린 시절 지금의 지역구인 대전 구봉산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으며 생각했던 행운의 추억은 그에게 문득 삶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을 드리지는 못해도 세 잎 클로버의 행복을 드릴 수 있도록 함께 가겠습니다. 진정성을 갖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치를 시작하며 국민에게 힘이 되고자 다짐했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 부인과 함께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국회의원 첫 세비 전액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기부했으며, 2010년 ‘생명나눔친선대사’에 위촉되어 장기기증운동 활성화에 노력했다.


공직자는 어항 속의 물고기


박 의장은 고건 서울시장 재임 시절 40대의 나이로 서울시 정무부시장(차관급)을 역임했다.


당시 차관급 공직자로는 전국 최초로 판공비를 공개하는 등 공직사회 개혁에 앞장섰다. ‘공직자는 어항 속의 물고기’와 같아 국민들이 늘 지켜보고 있다는 자기성찰의 결과다.


서울시 부시장 재임 시 공로로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계란 바위를 치다


박 의장은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국민회의 수석부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총선 출마를 위해 서울시 정무부시장직을 사퇴하려 했을 때, 당시 고건 시장이 크게 만류했다는 후문이다.
16대 총선 충청권에는 JP가 주도하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이 득세하고 있었다. 박 의장은 당선 가능성이 높은 수도권 출마 권유를 마다하고 고향인 대전을 택했다.


자민련 텃밭인 대전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하는 것은 도전을 넘어 모험으로 평가됐다.


“2000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사직하고 고향인 대전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한다고 결심했을 때 주변 사람들 모두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만류했어요. 하지만 제가 걷는 길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할지라도 누군가는 가시밭길, 옳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망국적 지역 구도를 깨야한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은 극소수에요. 낙선의 독배를 마신다 해도 그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국민통합의 길이고 뜻 있는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망국적 지역감정을 깨야한다는 사명감으로 사지를 택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헌정사에 기록될만한 단일 지역구 내리 6선이 되었다.


그 동안 우리 정치사에는 여러 부침이 있었다. 그 와중에 박 의장은 한 번도 당적을 바꾸지 않았다.

 

“당신 밖에 없소”

초선 국회의원이 된 박 의장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했다. 자민련 텃밭인 충청권에 처음으로 국민회의(민주당)의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의미가 크게 작용했을 듯하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이 되기 전 청와대 특보를 맡아 주례보고서를 2년간 꼬박꼬박 제출했던 성실함도 눈에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인지 국회의원 당선 후 김대중 대통령이 박 의장에게 직접 전화해 대변인 내정을 통보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변인감으로 박 의원 밖에 없어요. 박 의원이 경제도 잘 알고, 언론도 잘 알고, 적격자요. 대변인 역을 잘 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막힌 정국 해결사


박 의장은 16대 국회 여당 단독 대변인에 이어, 17대 재선의원으로 정무위원장을 맡아 관행을 바꾼 새로운 국회상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열린우리당 신행정수도 건설위원장·기획위원장을 지내는 등 국가균형발전에도 지속적인 뜻을 두었다.


18대 총선에선 당시 통합민주당 열세 국면에서도 대전에서 유일하게 당선됐다. 3선의 민주당 정책위의장으로 <100분 토론>에 출연해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토론으로 압도하며 인터넷에서 ‘팬더 아저씨’로 불리는 화제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막힌 정국을 푸는 곳엔 늘 의회주의자인 박병석 의장이 있었다.


‘한미소고기협상’ 여야 막후 타결(87일 식물국회 정상화), ‘1천억 달러 정부지급보증동의안’ 초당적 처리 결단으로 금융위기 극복 계기 마련 등 「조정의 달인」으로 우리 정치사를 새로 썼다.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 및 등유 특별소비세 인하, 서민금융활성화 방안 마련 등 친서민적 행보를 보였다.

 

야당의원 대통령 특사


19대 국회(4선) 국회부의장 선출 과정에서는 87년 민주화 이후 최고 득표율(98%)을 기록했다. 또 야당의원 최초 대통령 특사로 파견되는 등 정국 주요 고비마다 여야를 중재하는 관록을 보였다.


20대 국회(5선)에서도 단식 중인 야당 대표와 협상에 나서 국회 정상화를 이끌어내는 등 ‘조정관’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했다.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17.10.12) 당시 미래통합당 서청원 의원(8선)은 국정감사장에서 “새 정부 들어와서 어려울 때 대화하고 문제를 풀려고 한 사람은 박병석 의원 밖에 본 적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보기 드문 외교통·중국통


박 의장은 19대 대선 문재인 대통령 후보 공동선대위원장 겸 「국민의 나라 위원장」 직을 맡아 인수위 없이 시작되는 문재인 정부 집권 100일 초안을 마련했다.


문재인 정부 3일 만에 첫 대한민국 고위 외교사절단 대표단장 자격으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단독 면담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갈등 해소에 물꼬를 텄다. 이때 시 주석과의 단독면담을 중국어로 진행했다. 원내 보기 드문 ‘외교통·중국통’으로서의 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또 같은 해 한반도평화번영포럼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자민당 의원들과 한반도 정세와 북일 관계를 논의하는 등 폭넓은 외교 행보를 펼치기도 했다.

 

‘일 잘하는 국회’ 천명


박 의장은 국회 세종의사당 추진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이해찬 당대표와 공동으로 맡았다.
21대 국회 국회의장으로 「일 잘하는 국회, 품격 있는 국회, 신뢰 받는 국회」를 천명했다.

 

약력
▲대전고 ▲성균관대 법률학과 ▲16, 17, 18, 19, 20, 21대 국회의원 ▲중앙일보 홍콩특파원, 부국장 겸 경제부장 ▲서울시 정무부시장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국회 정무위원장 ▲민주당 정책위의장 ▲열린우리당 신행정수도 기획위원장·건설위원장 ▲19대 국회부의장 ▲국회 한중의회외교포럼 대표

 

[나눔일보 = 조장훈 대표기자 /본문 = 국회의장 공보수석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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