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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화만발'德華滿發']참 스승을 만나는 복

스님은 곧 ‘사(師)님’이었으니, ‘사승(師僧)’에서 온 말이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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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기사입력 2019-07-05

덕산 김덕권(前 원불교 청운회장·문인협회장, 카페 '덕화만발 http://cafe.daum.net/duksan725' 운영)

 

세상에 스승과 제자 사이와 같은 깊은 인연이 또 있을까요? 1527년(중종 22)에 간행된 최세진(崔世珍)이 어린이들의 한자(漢字) 학습을 위하여 지은 책,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보면 스승은 원래 불교의 ‘중’을 ‘스승’이라 칭한다고 했습니다. 스님은 곧 ‘사(師)님’이었으니,‘사승(師僧)’에서 온 말이 ‘스승’입니다.

 

오늘날 ‘스승’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란 뜻만이 아닙니다. 삶의 지혜까지도 가르치는 정신적인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네 인생에 자신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을 수 있는 스승이 한 분이라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요?

 

반대로 제자(弟子)는 지식이나 덕(德)을 갖춘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말하지요. 젊어서 화투(花鬪) 한번 안 해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화투에 빠져 살다시피 했는데도, ‘비광’의 뜻을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 빗속에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이 일본의 전설적인 서예가인 ‘오노도후(小野道風)’라는 실존인물이라고 합니다.

 

이 실제의 이야기는 한국의 명필인 한석봉의 어머니가 아들의 공부를 위해 어둠 속에서 떡을 썰었던 일화처럼 일본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나는 안 되는구나. 이젠 지쳤어!” 오노도후는 어려서부터 서예에 입문해서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자신의 실력을 느꼈고, 글씨는 갈수록 힘이 붙어서 거침이 없었습니다. 용이 꿈틀거리는 정도는 아니라도, 자신의 글에서 살아있는 강렬한 기운이 느껴져서 스스로 감탄했습니다. ‘이제 내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도 되겠지!’ 이렇게 자만할 즈음에 그는 한 스승을 만났습니다.

 

무명(無名)의 스승이 보여 준 필법의 세계 앞에 오노도후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스승의 필법 세계를 들여다보고 나니, 자신의 글씨는 그저 어린아이의 낙서 같았습니다. 그는 그동안 공들여 쓴 작품들을 모두 찢어버리고, 그 스승의 문하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한 획, 한 글자를 마치 베인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듯이 처절하게 썼습니다.

 

글씨에 점점 더 깊은 맛이 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스승은 칭찬 한마디 없이 항상 똑같은 말만 반복했습니다. “더 잘 쓰도록 해라.” 그는 점점 의심이 들었습니다. ‘혹시 스승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완성된 더 높은 경지를 스승이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 속에서 결국, 그는 좌절하게 되었고, 더 잘 쓰라는 스승의 말은 자신의 부족한 한계를 돌려서 말한 것으로 생각해서 비관한 끝에 서예 공부를 그만두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나는 안 되는구나. 이젠 지쳤어,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은 포기해야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날 아침에 그는 짐을 쌌습니다. 자신이 한없이 처량해서 스승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바랑을 메고 우산을 쓰고 문밖을 나섰습니다. 그동안 글씨에 쏟아 부은 시간이 얼마였던가!

 

그 고생을 하고서야 자신의 분수를 깨달았다는 아쉬움과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허비했던 그 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는 온갖 상념에 빠져서 집 앞의 버드나무 곁에서 우산을 쓰고 우두커니 서서 빗물이 홍수가 되어 흐르는 개천을 하염없이 쳐다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뭔가가 폴짝폴짝 뛰는 것이 보였습니다. 조그마한 개구리 한 마리가 빗물이 불어 홍수가 난 개천 속의 작은 바위 위에 갇혀있었습니다. 성난 흙탕물에 휩쓸리면 개구리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그 바위 위로 길게 뻗어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뛰어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버들가지가 너무 높아 아무래도 개구리가 붙잡기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 개구리의 신세가 꼭 자신의 처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도 나처럼 네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구나!”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여서 외면하려는 찰나에, 거센 바람이 불어 가지가 개구리 쪽으로 휘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찰나의 순간에 또 한 번 펄쩍 뛰어오른 개구리가 마침내 그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았습니다.

 

잠시 후 그 개구리는 버들가지를 타고 유유히 올라가 홍수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망연자실한 채 한참을 그곳에 서 있다가 바랑을 풀어 내려놓고 나무 앞에 엎드려 큰절을 했습니다. 자신에게 깨우침을 열어준 존재에게 그렇게 경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나왔던 문으로 다시 들어가 스승에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사죄를 했습니다. 그는 다시 초심으로 공부를 시작해서 일본 최고의 학자이자 서예의 명인 ‘오노도후’가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저 화투 속의 개구리처럼 노력하는 사람에게 행운이 따릅니다. 모름지기 제자는 배움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죽기 살기로 수행을 쌓으면, 언제나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킬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 스승의 참 뜻은 무엇일까요?

 

첫째, 스승은 내 마음을 낳아주고 키워주신 분입니다.

둘째, 스승은 글과 말과 행동과 심법을 전해주는 분입니다.

셋째, 스승은 모든 면에서 제자 이상이 되신 분입니다.

넷째, 스승은 만나는 사람 모두를 스승으로 모시는 분입니다.

다섯째, 스승은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와 양심까지도 스승으로 모십니다.

 

우리 수도인(修道人)에게는 세 가지 스승이 있습니다. 말과 글과 행동으로써 나를 가르쳐 주시는 사람 스승과, 눈앞에 벌여있는 무언의 실재로써 나를 깨우쳐 주는 우주 스승과, 스스로 자기를 일깨워주는 양심 스승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정법(正法)에 맥(脈)을 댄 스승이라야 진짜 참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정법의 스승을 만나는 것 이상의 큰 복은 없지 않을 런지요!


단기 4352년, 불기 2563년, 서기 2019년, 원기 104년 7월 5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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