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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화만발'德華滿發']업보(業報) '행위와 운명'

숙명은 바꿀 수 없는 것, 업(業)은 언제고 바꿀 수 있으며 순간순간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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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기사입력 2018-10-17

덕산 김덕권(前 원불교 청운회장·문인협회장, 카페 '덕화만발 http://cafe.daum.net/duksan725' 운영)

 

 제가 젊어서는 직업상 여러 나라를 뛰어다닌 적이 있고, 도덕이 무엇인 줄을 알고부터는 진리를 전파하려 전 세계를 뛰어다닌 적이 잦았습니다. 그리고 한참 원불교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제가 맡은 [원불교 청운회]나 [원불교 문인협회] 등등의 조직을 넓히고 활성화 시키려고 물불 모르고 뛰었지요.


그러나 그만 그 업보(業報) 탓인지 양 동맥이 막혀 다리가 아픈 바람에 그 좋아하던 여행도 다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업보치고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어찌 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저의 업보인데 달게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를 사자성어로 ‘감수불보(甘受不報)’라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업보란 무엇일까요? 자신이 행한 행위에 따라 받게 되는 운명을 말합니다. 그러나 불가(佛家)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업보는 자신의 행동에서 나온 결과다.”라고 말입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판단, 행위에서 나온 것이지 남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더 이상 남 핑계로 자신의 업보를 반복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행복 총 양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악성(樂聖) 베토벤은 사랑했던 여인이 떠나고, 난청(難聽)이 찾아오면서 한때 절망에 빠졌습니다. 현실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어느 수도원을 찾아갔지요. 수도사를 찾아간 베토벤은 힘들었던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아갈 길에 대한 조언을 간청했습니다.


고민하던 수도사는 방으로 들어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와 말했습니다. “여기서 유리구슬 하나를 꺼내보게” 베토벤이 꺼낸 구슬은 검은색이었습니다. 수도사는 다시 상자에서 구슬을 하나 꺼내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베토벤이 꺼낸 구슬은 검은 구슬이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이보게, 이 상자 안에는 열 개의 구슬이 들어있는데, 여덟 개는 검은색이고 나머지 두 개는 흰색이라네. 검은 구슬은 불행과 고통을, 흰 구슬은 행운과 희망을 의미하지. 어떤 사람은 흰 구슬을 먼저 뽑아서 행복과 성공을 남보다 먼저 이루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네처럼 연속으로 검은 구슬을 뽑기도 한다네. 중요한 것은 아직 여덟 개의 구슬이 남아 있고, 그 속에 분명 흰 구슬이 있다는 거야.”


이 ‘행복 총 양의 법칙’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같은 양의 행복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까지 고통스러운 일만 많았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 런지요? ‘앞으로는 행복할 일만 남았다’라고요. 이것이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언제까지 계속되는 불행이란 없습니다. 누구나 살아오면서 나쁜 일만 저지른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나쁜 일은 나쁜 일대로 자신이 지은대로 받는 것이 인과이고, 그 결과가입니다.  불가에서는 운명이나 숙명 대신에 스스로의 삶을 내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는 인과(因果)와 업보(業報)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살 것인지, 어느 정도의 학벌과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얼마 정도의 건강을 누리다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 이런 것들에 대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업력(業力)에 이끌려 태어납니다.


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말로 행동으로 생각으로 행하는 행위의 총합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정의 원인은 나의 과거행위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의 온갖 행위들에 의해 현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내 현재의 행위에 따라 또 다시 내 미래가 바뀔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 아닐 런지요?


자신의 행위에 따라, 자신의 마음에 따라, 자신의 욕심과 집착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마음공부와 수행과 기도의 정도에 따라, 내 삶은 언제든지 180도 확연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달라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의 삶은 그 궤도(軌道)를 수정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숙명(宿命)이라고 이름 짓지 않고 업이라고 이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숙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반해 업이라는 것은 언제고 바꿀 수 있으며, 바꿀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웃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과 벗을 찾아가 위로해 주며, 지혜로운 삶의 길을 안내 해 주는 공덕(功德)을 지었다면, 바로 이생에는 있지도 않았을 선지식을 만나는 행운이 생겨날 수도 있어 마침내 상자 속의 흰 구슬을 꺼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업을 우리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짓는 것입니다.


첫째, 신업(身業)입니다.

신업은 몸으로 짓는 3가지 악업으로 살생, 도둑질, 사음(邪淫)입니다. 몸으로 짓는 삼업은 불살생, 불투도(不偸盜), 불사음계(戒)로 브레이크를 걸어 통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구업(口業)입니다.

구업은 거짓말(妄語), 속이는 말(綺語), 이간질하는 말(兩語), 나쁜 말(惡口)입니다. 이 구업은 불망어계와 8정도의 정어(正語)로 구업을 다스리면 됩니다.


셋째, 의업(意業)입니다.

뜻으로 짓는 3가지 업으로 탐욕(貪慾), 성냄(瞋恚), 어리석음(痴暗)입니다. 줄여서 ‘탐진치(貪瞋癡)’라고 하며, 삼독이라 불리는 ‘업 덩어리’입니다. 탐욕은 재물, 색(色), 명예를 탐내어 집착하는 욕심이지요. 이업은 6바라밀의 보시(布施)와 지계(持戒)로 단속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음양상승(陰陽相乘)의 도’를 따라 선행자(善行者)는 후일에 상생의 과보를 받고, 악행 자는 후일에 상극(相剋)의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업보가 올 때 흰 돌을 뽑았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검은 돌을 뽑았다고 낙담하고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악업도 달게 받으면 언젠가는 흰 돌이 찾아올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10월 1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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